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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Apr

사진작가 주상연의 닻프레스

작성자: 전예진주임 등록일: 2012-04-17, 09:24:14 조회 수: 11159

소박하지만 세련된 공장은 책을 만드는 공방이다. 작은 사진 스튜디오도 함께 있고 전시와 책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도 있다. 미술관과 카페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닻프레스의 항해를 이끄는 건 사진작가 주상연이 맡았다.

닻프레스에서 사진작가 주상연의 타이틀은 대표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사진작가로 살았다. 그리고 2006년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4년 만에 돌아온 그녀가 시작한 일이 바로 책 공방 닻프레스다. “예중, 예고, 예대라는 전형적인 코스를 밟고 작가가 됐죠. 운이 좋게도 작업을 하면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요. 작가로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겪으면서도 제자들에게 작업만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했어요. 다른 걸 보고 더 많은 걸 느끼고 싶어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어요.” 샌프란시스코는 예술적으로 풍부했지만 미국의 여타 대도시에 비해 덜 상업적인 곳이었다. 그녀가 사진을 공부한 SFAI(San Francisco Art Institute)는 160년 전통의 예술 학교였고 최초의 사진 학과이기도 했다. “많은 것이 달랐고 많은 것을 느꼈죠. 대학원에서 친구들의 작품집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친구가 있었죠. 얼마간 그 일을 도운 적이 있어요. 그때 느꼈던 것이 한시적인 전시를 장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사진작가는 좋은 사진집을 만드는 일이 정말 중요하죠. 그때 한국에 돌아오면 꼭 작은 책 공방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시작한 ‘닻프레스’, 책이 중심이 돼서 무언가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로 ‘닻’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빛을 찍어내는 의미의 사진 스튜디오 ‘빛’, 여러 사람에게 닻프레스의 영감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의 매거진 ‘깃’, 공간화된 책을 지향하는 ‘닻’ 미술관, 사람들 간의 소통과 나눔을 의미하는 카페 ‘돛’으로 이어졌다. “과거의 제자나 친구들이 모여 조촐하게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일이 너무 많아졌죠. 지금은 겨우 ‘새싹’ 같은 단계입니다. 어떤 일이 건강한 나무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작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지에서 쉬고 열매를 따 먹는 풍부한 곳이 됐으면 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고 각자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길 바라고요.”

북 메이킹. 페이퍼 메이킹, 프린팅, 바인딩 등의 커리큘럼을 갖고 체계적인 책 만들기를 가르치는 센터포더북(San Francisco Center for the Book)은 닻프레스의 롤 모델이다. 닻프레스는 역시 현재 ‘수제책공방’ ‘포토+북 워크샵’ ‘독립잡지 만들기’ ‘실크스크린’ ‘사진의 生기초’ 등 다양한 워크숍을 꾸리고 있다. 소규모 출판에 맞는 콘텐츠를 찾아 책과 에디션스, 프린트도 만들고 있다. “소규모 출판에 맞는 콘텐츠는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책으로 전환했을 때 시너지가 있는 작업이 있죠. 사진이나 판화 등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책은 간접적이지만 그 내용을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나눌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물론 그 소재는 작가의 작업일 수도 있고 일반인의 추억이나 특별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닻프레스는 그렇게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창조성이 닻프레스를 통해 시도되길 바란다. 닻프레스가 운영하는 닻미술관 역시 마찬가지다.

스패니시 스타일의 외장 마감, 매끈한 콘크리트 기둥, 아담한 중정 거기에 한국 전통 가옥에나 쓸 법한 육중한 나무 문과 기와를 얹었다. “건축을 배우진 않았지만 어릴 때 건축일을 많이 했어요. 집 공사와 관련된 일들이었죠. 사실 캘리포니아의 SFAI에 들어섰던 첫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고 그곳을 떠올리며 건물을 지었어요. 중정의 내밀함에서 강한 충격과 인상을 받았죠. 공간이 주는 기운이 너무 좋았어요. 닻미술관은 여성성을 지닌 따뜻한 건물이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건물 가운데 중정을 두고 연못을 만들었죠. 저의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을 담고자 했어요. 건축적인 명분보다 개인적인 진심을 담았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양식의 혼재다. 낯설지만 편안한 안락함을 주는 공간이 묘하게 매력 있다. 전시 기획에 관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닻미술관. 현재는 미국의 3대 여류 사진작가 이모젠 커닝햄의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들을 전시 중이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니 퍼즐 맞추듯이 하나하나 진행된 주상연 대표의 닻프레스는 동시에 작가 주상연의 작업이기도 하다. 작은 정원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끼고 ‘진짜’를 알아보는 선명한 눈을 가진 사람, 백 마디 말보다는 진심이 담긴 하나의 행동과 여백 같은 침묵에 가치를 두는 작가 주상연의 현재 작업이 단단한 닻을 내리길 고대한다.



1 책 만드는 공방 닻프레스의 구의동 사무실에서 만난 주상연 대표. 닻프레스가 만든 책, 참고할 만한 좋은 책이 전시된 책장도 보인다.
2 주상연 대표의 컬렉션인 사진작품집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공간은 카페 겸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3 갤러리 겸 카페처럼 사용하고 있는 공간. 현재는 주상연 대표의 스승이자 멘토인 사진작가 린다 코너(Linda Connor)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1,3 종이 선택, 제본, 북바인딩, 커버링 작업까지. 책을 만드는 모든 공정이 가능한 닻프레스의 공장 같은 공방.
2 책을 펼쳐놓은 듯한 모양의 책장이 인상적이다. 닻미술관 건축을 함께한 대목의 솜씨다.
4 북바인딩, 커버링에 사용되는 원단들.
5 활자와 기록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하는 닻프레스.
6 닻프레스 공방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주상연 대표의 개인 작업실.
7 닻프레스와 나란히 자리하는 사진 스튜디오 ‘빛’의 풍경 하나.


1,2 주상연 대표의 개인 작업실 모습. 그라인더로 가공한 함석문 안으로 암실이 자리한다.
3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위해 준비한 공간. 풍경과 고요가 배경이 된다.
4 닻미술관 2층에는 작가와의 대화, 세미나 및, 워크숍을 위한 세미나룸이 있다.
5 닻프레스가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의 ‘닻미술관’. 지금은 미국이 자랑하는 3대 여류 작가 이모젠 커닝햄(Imogen Cunningham)의 흑백사진전 <이모젠 커닝햄: 사진들>이 전시 중이다.


1 창밖으로 닻미술관의 정원을 품은 연못이 보인다
2,3 광주에 위치한 닻미술관의 뮤지엄 카페 돛. 책, 음악, 커피, 아트 상품이 있는 공간이다.
4 주상연 대표의 추억과 애정이 바탕이 된 닻미술관은 정석과 규칙이 아닌 개인적인 진심을 재료로 지었다. 낯설지만 편안한 묘한 아늑함이 있다.

에디터 곽소영
포토그래퍼 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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