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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May

이불에겐 2부가 없다

작성자: 전예진주임 등록일: 2012-05-31, 09:17:29 조회 수: 10413

아티스트 이불이 일본 모리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했다. 그녀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심미적인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낯선 아름다움 속에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이불, 그녀에게 이번 회고전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성찬이 아니다. 더 높은 비약을 다지며 발을 구르는, 새로운 성찰의 장일 뿐이다.



1980년대 말, 핑크색 몬스터와도 같은 형상으로 국내와 일본 거리를 활보하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이불. 1997년에는 시퀸과 스팽글로 치장한 날생선을 전시, 부패하며 발생하는 악취 때문에 미술관과 대치하는 상황을 벌이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고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매력적인 법. 나사로 조인 것과 같은 강단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이불은 특유의 도발적인 매력으로 세계 미술계를 압도했다. 이불의 도발은 일반과 차원이 다른 독특한 미의식에서 출발한다. 솔직히 지금껏 그녀의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아름답다라는 감탄사를 쉽게 내뱉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충격적이고, 아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불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외감이 인다.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녀의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서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담은 듯한 이불 작품의 기이한 형상 속에서 카타르시스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불은 지난 3월 22일, 일본 출신 작가들에게조차 높은 벽이라 일컬어지는 모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온 자기 자신을 잠시 멈추고 그간 활동의 결정체들과 마주 선 이불. 그녀는 “이번 전시를 위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해오면서 기존과는 또 다른 고뇌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는 소회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이상과 번뇌를 소재 삼아 작업을 펼쳐야 하는 작가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가장 큰 상대는 결국 자기 자신이다. 이불은 무엇보다 회고전 앞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아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뒤돌아보기를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당당함을 입혔고, 작업의 흐름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사실 일반적으로 회고전이라 했을 때 성대한 단원의 막을 내리고 정리하는 듯한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불에게 있어 이번 회고전은 멈춤과 정리가 아니다. 기존의 나라는 거대한 역사를 발판으로 한 발짝 앞서 나가는 것이다. 이불에겐 본디 멈춤이란 없다.

이번 전시는 쿠사마 아요이, 아이 웨이웨이에 이어 모리 미술관에서 세 번째로 개최하는 아시아 작가의 개인전이자 한국 작가로는 처음 초대받은 회고전이지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처음 회고전 제의를 받았을 때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어요. 기쁘기도 했지만 지금이 과연 내가 회고전을 가져도 되는 시기인지 고민되었고, 또 회고전을 갖는다면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됐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작품 전체가 모여 있을 때, 제 주제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게 바로 이번 회고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프닝을 무사히 치른 현재, 저는 이번 회고전이 만족스러운 편입니다. 제가 그동안 부끄럽게 살진 않았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회고전의 개최지가 왜 하필 일본인 거죠. 애초에 순회전으로 구상했어요. 세계를 돌아 마지막으로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게 말이죠. 다만 그 시작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아시아 국가였으면 했습니다. 제가 아시아 작가인 것도 사실이잖아요. 이런 생각을 갖고 움직이다 보니 개최지가 일본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지금껏 작업해온 작품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서 보니 어떤 생각이 드나요. 작가의 눈에만 들어오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유난히 초기 작업이 눈에 들어옵니다. 젊은 시절의 저에겐 수많은 질문과 고민이 열정만큼이나 많았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제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힘들었고요. 지금에 와서야 제가 당시에 하려고 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해지는 것 같네요. 그리고 그 질문들이 현재의 작업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이불: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라는 전시명이 기대했던 만큼 독특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오래전에 연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작업이 잘 안 풀려 상당히 우울해하고 있었죠. 그때 바로 이 편지 한 통이 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편지에 담겨 있는 따뜻함과 사랑이 저에게 상당히 큰 위안이 됐거든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바로 이 편지에 담긴 문구예요.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을 이번에 제 전시를 감상하는 관객들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통해 신작 ‘더 시크릿 셰어러(The Secret Sharer)’까지 발표했어요. 전시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벅찼을 것 같은데 말이죠. 회고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16년간 키우던 개가 죽었습니다. 마당에서 키우던 황구였는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밖을 바라보면 나이 들은 황구가 안쓰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곤 했죠. 개가 죽고 나니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절을 함께한 그 녀석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커지더라고요. 이런 제 마음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번 신작을 만들었습니다.

사생활은 잘 알려진 바가 없는데, 개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제 자신을 애견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친구같이 자연스럽게 옆에 존재하던 황구를 애정으로 키웠을 뿐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애견인이었나 싶기도 해요.

미술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씀하곤 했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 건가요. 그럼요. 하지만 그 강도는 조금 바뀌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정말 미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확신했거든요. 살아오면서 생각지도 않은 벽에 부딪히고, 실패도 수차례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꿈을 꾸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시도도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고, 실패가 반복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꿈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잖아요. 실패한 것조차 과감하게 언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세상은 움직일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회고전을 갖는 저이지만, 아직까지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솔직히 예술을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예술은 저에게 있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창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의 흔적일 뿐입니다. 지금껏 작가로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예술 그 자체를 추구한 적은 없습니다. 제 의지와 소망에 초점을 맞춰 살았고, 그 과정에 남겨진 흔적들이 예술이 되었을 뿐입니다.

작가로서 사는 것, 쉽지 않게 들립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 때 힘든 것만큼 힘들죠.

전시를 개최할 때마다 퍼포먼스를 기대하곤 했습니다. 초창기 작업은 전대미문의 퍼포먼스들로 가득하잖아요. 언젠가 당신의 전시에서 퍼포먼스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저에게 종종 퍼포먼스를 기대하곤 하지만 작가에게 이 같은 기대가 생기는 시점이 바로 그 작품을 멈춰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시선과 작업은 대중의 기대에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회고전을 통해 당신이 얻은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에너지요. 이번 전시를 통해 제가 그동안 스스로에게 어떻게 질문해왔고, 또 이 질문들을 어떻게 제 작품 속에 표현해냈는지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주 소중한 것을 뜻밖의 기회를 통해 떠올린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것은 앞으로 제 작업 활동에 또 다른 동기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1 Lee Bul. ‘Cyborg W4’, 1998. Cast Silicone, Polyurethane Ffilling, Paint Pigment, 188×60×50cm.
Photo: Yoon Hyung-moon. Courtesy: Studio Lee Bul.

2 이불의 예술은 재료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숙련된 테크닉을 바탕으로 완성되곤 했다. Lee Bul. ‘Sternbau No.4’, 2007. Crystal, Glass and Acrylic Beads on Nickel-Chrome Wire, Stainless-Steel and Aluminum Armature, 131×71cm Diameter.
Photo: Patrick Gries. Courtesy: the Artist and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3 Lee Bul. ‘Mon grand Récit: Weep into Stones…’, 2005. Installation View, Taipei Biennial, 2006. Polyurethane, Foamex, Synthetic Clay, Stainless-Steel and Aluminum Rods, Acrylic Panels, Wood Sheets, Acrylic Paint, Varnish, Electrical Wiring, Lighting, Approximately 280×440×300cm as Installed.
Courtesy: Taipei Bien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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