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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Jun

그녀들의 프롤로그

작성자: 전예진주임 등록일: 2012-06-26, 09:14:36 조회 수: 12597

한 지붕 아래 갤러리를 함께 꾸려나가는 모녀의 따뜻하고 겸손한 삶을 느끼고 돌아왔다. 아담하지만 양질의 전시를 선보이는 김리아갤러리의 김리아 대표와 큐레이터 김세정을 만나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방법, 작품을 보는 순수한 기준을 배웠다.


공기조차 숨을 죽인 듯이 조용한 청담동의 대로변. 액셀을 힘있게 밟은 고급 세단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갈 뿐 고급 가구 브랜드 쇼룸이 모여 있는 청담동의 가구 골목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정적이 감돌았다.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제서야 육중한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한낮의 거리가 주는 느슨하고 평화로운 활기가 느껴졌다. 얼마 전 K&갤러리의 김리아 대표도 빨간 벽돌 외관의 다세대 빌라가 모여 있는 청담동 골목 초입에 본인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갤러리스트서 제2막을 맞이했다.

김리아갤러리의 스토리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30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부부는 남편의 발령지인 대구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신혼 살림을 꾸렸다. 신혼 생활은 달콤했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일에 종사하던 남편은 잦은 두통에 시달렸다. 그가 찾은 치유책은 갤러리에 다니는 것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던 남편은 희한하게도 갤러리에 가서 그림을 보다 보면 두통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눈에 어른거리는 작품을 사오는 날이 생겼고, 점차 그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아내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작은 집의 벽에 책장을 놓고 벽시계와 달력을 걸고 나면 그림을 걸 벽이 마땅치 않았다. 욕심껏 걸어도 몇 점을 넘길 수 없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작품이 쌓여가면서 젊은 부부도 함께 나이를 먹었다. 어느새 지긋한 중년에 이른 부부는 서울에 정착했고 집을 넓혀서 이사했지만 역시 작품을 보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예술 애호가인 남편 덕분에 30여 년의 세월을 작품과 함께 살아온 아내는 남편에게 수장고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의 작은 공간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이왕이면 소장품 몇 점을 걸 갤러리 공간도 있으면 더욱 좋겠다 싶었다. K&갤러리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남편 따라 깊은 예술 세계에 탐닉하게 된 이가 바로 김리아 대표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K&갤러리에 들어섰을 때 갤러리의 벽을 가득 메운 구자현 작가의 대형 목판화 작품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소리 없는 힘에 이끌려 발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그 앞에 서 있는 에디터에게 김리아 대표는 템페라 작업을 주로 선보이던 구자현 작가의 신작 목판화에 대한 설명을 들려줬다. 그 옆을 지키던 젊고 이지적인 외모의 큐레이터이자 김리아 대표의 딸인 김세정도 그때 처음 만났다. 미국 로드 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뉴욕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던 그녀는 김리아 대표가 갤러리를 준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RISD에 재학할 때도 건축학부 건물의 로비에 걸 작품을 기획하고 고르는 일을 즐겨 했었어요. 그래서 큐레이터의 일이 낯설지 않았죠.”
김리아 대표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에서 전시실을 헤매며 보내는 시간보다 작은 갤러리에서 몇 점 안되는 작품을 감상하며 아득한 생각의 나락에 빠질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는 소규모 갤러리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청담동의 한 다세대주택을 구입했다. 처음에는 전 층을 갤러리로 꾸밀 계획이었는데, 여러 세대가 사는 빌라가 비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큐레이터이자 전직 건축학도인 김세정이 이 빌라의 빨간 벽돌 외관과 내부 구조를 살린 설계안으로 레노베이션을 진행했다.

반지하의 천장을 터서 천고가 높아진 1, 2층은 김리아갤러리이며 3층은 김세정의 신혼집, 내부 계단으로 연결되는 4, 5층은 김리아 대표 부부의 공간이다. “주변 사람들은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비용이나 여러 측면에서 낫다고 조언했어요. 하지만 우리 둘은 생각이 조금 달랐어요. 부수고 다시 짓는 것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면서 이 건물이 겪어온 세월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무엇보다도 빨간 벽돌집이 모여 있는 골목에 위압감을 주는 새 건물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물의 파사드는 자신의 것만은 아니에요. 공적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재료만 고집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골목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요.” 원래의 공간 분할과 구조를 존중한 덕에 김세정의 신혼집은 세 덩어리로 나뉘었다. 투 룸이 있던 자리에는 침실과 주방이 생겼고, 원룸이 있던 자리에는 각각 드레싱룸과 서재 겸 작은 작업실이 생겼다. 그런가 하면 같은 평수임에도 불구하고 김리아 대표의 공간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방은 딱 두 개, 부부침실과 드레싱룸이 전부고 옥탑에 있는 남편 서재까지 합하면 세 개가 고작이다.
인테리어 공사를 진두지휘한 김세정이 설명을 덧붙인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이 남긴 말 중에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유명한 금언이 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추구하는 철학이에요. 공간은 옷 같은 거라서 사람을 튕겨내면 안되거든요. 조미료나 손톱깎이처럼 사소한 물건까지 제자리를 찾아주는 게 제가 할 일이었어요. 그리고 생활의 동선, 라이프스타일 방식까지 배려한 디자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 집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벽에 걸린 작품들이 말을 걸어온다. 색채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걸어오는 천 루어빙의 작품, 꽃처럼 표현된 도시의 도로망이 다시 한 번 도시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주는 이정섭의 ‘컴플렉스 시티 라이팅-모스크바’, 팝아트의 장르에 한 획을 그은 짐 다인의 작품과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시리즈까지 다양하다. 김세정의 다이닝 공간에 걸린 금빛 십자가 작품은 구자현이 템페라 기법으로 작업한 것이다. 이 모든 작품을 오랜 시간에 걸쳐 수집해온 김리아 대표에게 좋은 작품을 고르는 그녀만의 기준을 물었다. “잘 팔릴 그림보다도 오염되지 않고 건강한 정신이 깃든 그림을 찾고 있어요. 구자현이나 이우환처럼 어떤 공간에 걸어도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긍정적인 철학과 에너지를 전해주는 작가를 만나고 싶죠.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 마르셀 뒤샹의 정신도 좋고요. 이제 그림에 찍은 방점 하나만 보아도 작가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져요. 그런 작품과 정신적이고 단순한 삶을 사는 게 제가 원하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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